[07/19] 마틴 루터의 생애와 신학사상5
Update: 2015-07-19
Description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귀환편
루터 부재의 비텐베르크 상황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 숨어 지내던 10개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논쟁과 개혁이 계속되어 점차 과격한 양상을 보였고 이에 따라 소요와 불안한 상황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표적 상황으로 먼저 루터를 추종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이탈했고 루터의 개혁 동료인 멜란히톤은 성만찬에서 회중에게 분잔을 시행했으며 독신 수사나 사제들이 독신서원을 깨버린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제들의 독신 전통은 2~3세기 남녀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비롯되어 11세기 교회가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했으며 1139년 라테란공의회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이후 강하게 유지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대학동료이자 종교개혁자인 칼 슈타트는 미사 철폐와 설교중심 예배로의 개혁, 전통적 성직자 복장 폐지,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예배 진행, 고해성사와 사순절 금식의 폐지, 교회의 성화 철거 등 상당히 과격한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개혁론을 폈던 루터와는 차별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이들 둘은 나중에 결별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시장경제 형성단계에서 시 행정의 자율권을 가짐에 따라 비텐베르크 시 당국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 가난한 자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비어 있는 수도원과 교회 재산으로 공동금고를 조성하여 개혁 재원을 마련하는 등 매우 개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센의 선제후가 이러한 시 당국의 개혁에 반대함으로써 시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근 광산 도시인 츠비카우에는 한 예언자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나 유아세례 폐지를 주장하는 등 사회적 불안 상황을 고조시키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귀환
1522년 3월 1일 루터는 잠행을 마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만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하며 사순절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개혁의 구상을 밝혔습니다. 루터는 이 구상에서 급진적 개혁 안에는 분노가 존재하여 끝내 폭력을 수반하게 되므로 개혁의 방법은 온건하게, 개혁의 속도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개혁이 본격화 되던 비텐베르크는 여러 상황과 노선이 혼재되어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루터는 이렇게 자신의 노선을 확고히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라틴어 예배로의 복귀와 성만찬에서 분잔 시행, 설교중심의 예배로 개혁, 회중이 예배순서 참여 등이었습니다.
점진적인 교회개혁을 주장한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 당국과 함께 국가와 사회개혁에도 나섰습니다. 이 때 루터는 먼저 결혼은 악마의 작용이 아니고 부부가 파트너로서 가족공동체를 구성해야 하고, 사회 약자와 빈자, 소외자를 돕기 위해 중세교회재산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금융경제가 시작된 시점에서 푸그 가문의 부의 독점과 고리채 등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중심 교육제도 개선으로 교회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을 시행하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 즉 정교분리로 두 개의 왕국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교회와 하나님의 권세를 위탁받는 국가권력에 모두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교회개혁과 마찬가지로 국가, 사회 개혁에 있어서도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개혁의 동료였던 칼 슈타트 등 과격한 개혁 세력들과 끝내 결별하였고 이 때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하여 칼 슈타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축출되어 스위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루터와 대립된 노선을 걸었던 칼 슈타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강조하며 신비주의적 성향을 띄었고 외형적이며 가시적인 것은 부정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서 끝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개혁 세력으로 토마스 윈츠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칼 슈타트보다 더욱 과격하고 더욱 신비주의적인 사람으로 농민전쟁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금욕적이었고 내면의 말씀에 집중했으며 주관적 확신에 의해 행동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1524년 농민들과 접촉하여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주장하며 그 나라를 위해 칼을 들고 일어서자고 선동해 농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과격한 개혁에 루터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고 전쟁을 이끈 토마스 윈츠는 1525년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루터 부재의 비텐베르크 상황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 숨어 지내던 10개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논쟁과 개혁이 계속되어 점차 과격한 양상을 보였고 이에 따라 소요와 불안한 상황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표적 상황으로 먼저 루터를 추종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이탈했고 루터의 개혁 동료인 멜란히톤은 성만찬에서 회중에게 분잔을 시행했으며 독신 수사나 사제들이 독신서원을 깨버린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제들의 독신 전통은 2~3세기 남녀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비롯되어 11세기 교회가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했으며 1139년 라테란공의회에서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한 이후 강하게 유지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대학동료이자 종교개혁자인 칼 슈타트는 미사 철폐와 설교중심 예배로의 개혁, 전통적 성직자 복장 폐지,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예배 진행, 고해성사와 사순절 금식의 폐지, 교회의 성화 철거 등 상당히 과격한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개혁론을 폈던 루터와는 차별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이들 둘은 나중에 결별하게 됩니다.
한편 당시 시장경제 형성단계에서 시 행정의 자율권을 가짐에 따라 비텐베르크 시 당국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 가난한 자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비어 있는 수도원과 교회 재산으로 공동금고를 조성하여 개혁 재원을 마련하는 등 매우 개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센의 선제후가 이러한 시 당국의 개혁에 반대함으로써 시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근 광산 도시인 츠비카우에는 한 예언자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나 유아세례 폐지를 주장하는 등 사회적 불안 상황을 고조시키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귀환
1522년 3월 1일 루터는 잠행을 마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보호만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하며 사순절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개혁의 구상을 밝혔습니다. 루터는 이 구상에서 급진적 개혁 안에는 분노가 존재하여 끝내 폭력을 수반하게 되므로 개혁의 방법은 온건하게, 개혁의 속도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개혁이 본격화 되던 비텐베르크는 여러 상황과 노선이 혼재되어 매우 혼란스러운 가운데 루터는 이렇게 자신의 노선을 확고히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라틴어 예배로의 복귀와 성만찬에서 분잔 시행, 설교중심의 예배로 개혁, 회중이 예배순서 참여 등이었습니다.
점진적인 교회개혁을 주장한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 당국과 함께 국가와 사회개혁에도 나섰습니다. 이 때 루터는 먼저 결혼은 악마의 작용이 아니고 부부가 파트너로서 가족공동체를 구성해야 하고, 사회 약자와 빈자, 소외자를 돕기 위해 중세교회재산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금융경제가 시작된 시점에서 푸그 가문의 부의 독점과 고리채 등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중심 교육제도 개선으로 교회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을 시행하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 즉 정교분리로 두 개의 왕국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교회와 하나님의 권세를 위탁받는 국가권력에 모두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교회개혁과 마찬가지로 국가, 사회 개혁에 있어서도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개혁의 동료였던 칼 슈타트 등 과격한 개혁 세력들과 끝내 결별하였고 이 때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하여 칼 슈타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축출되어 스위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루터와 대립된 노선을 걸었던 칼 슈타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강조하며 신비주의적 성향을 띄었고 외형적이며 가시적인 것은 부정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서 끝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개혁 세력으로 토마스 윈츠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칼 슈타트보다 더욱 과격하고 더욱 신비주의적인 사람으로 농민전쟁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매우 금욕적이었고 내면의 말씀에 집중했으며 주관적 확신에 의해 행동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1524년 농민들과 접촉하여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주장하며 그 나라를 위해 칼을 들고 일어서자고 선동해 농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과격한 개혁에 루터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고 전쟁을 이끈 토마스 윈츠는 1525년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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